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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s Beyond Right
[시사다큐] 해외에 숨겨진 한국 땅 있다!!! 본문
<전문 cafe.naver.com/woorimaul/6327 ..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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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계절도 한국과는 정반대인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서 북서쪽으로 98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에는 한국의 숨겨진 땅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정부 주도 농업이민을 위해 시범농장용으로 구입한 이 국유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70배. 구입비용은 211만 달러. 막대한 비용을 들여 머나먼 남미에 땅을 사놓고도 27년간 방치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7년간 벼 한 포기, 채소 한 단 키워보지 못한 황무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여서 길도 사라지고 없다. 누구의 것이기에 사유권을 표시하는 철조망조차 없이 버려져 있는 것일까?
그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1978년 정부의 남미 농업이민자 모집 공고를 보고 머나먼 땅 아르헨티나까지 떠나온 김인석 씨. 그의 가슴속에는 오랜 세월 굳어져 온 응어리가 있다.
“내 땅을 갖고 내 땅에서 수확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었던 김씨에게 남미 농업이민은 새로운 희망이었고, 농업이민의 실패는 평생의 한이 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이민을 보낸 한국 정부에도, 이민자들이 말이 안 통하고 현지 사정에 어둡다는 점을 악용한 교민 브로커들에게도, 서로 돕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된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침묵했다.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김인석 씨는 현재 중앙교회 노인대학이 소유한 라 플라타 지역에서 소일거리로 야채농장을 경영하며 노인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김씨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5월28일 농업이민으로 아르헨티나에 와서 실패한 후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민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다.
아르헨티나에 숨겨진 2만ha의 한국 땅
농업고와 농대를 나온 후 대구 지역에서 화학과 교사생활을 하던 김씨는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한국에서 농사의 꿈을 펼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미의 광활한 땅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1978년 보건사회부(신현확 장관)의 모집 공고에 따라 다른 17가구의 이민자들과 함께 2만 달러의 투자금을 내고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의 이스크자쿠 농장에 도착한 김씨.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옥한 농토 대신 기온이 한낮에는 40~50도씩 올라가고, 강수량이 170㎜에 불과한 메마른 사막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가운데에서도 밤낮을 일해 6개월 만에 콩을 재배하는 데는 성공했다. ha당 1.6~1.7t의 콩을 수확한 것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 입장에서는 고무적인 일로, 당시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막에서 콩농사를 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평작도 안 되는 수확량을 거두기 위해 밤낮을 무더위와 싸워가며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콩 재배 성공 사례는 청와대에까지 보고돼 대통령 특별하사금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는 17가구의 농업이주민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도시로 나와 봉제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크자쿠 농장이 성공 사례로 한국 정부에 잘못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은 이스크자쿠 인근에 대규모의 땅을 구입해 한국인 집단농장과 코리아타운을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랴흐타마우카(llajta-mauca) 땅이다. 300가구의 농업이민자 입주를 목표로 시범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구입한 2만ha의 이 땅. 하지만 결국 단 한 가구의 이민도 받지 못한 채 27년 동안 ‘숨겨진 한국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쪽으로 986km 떨어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에 위치한 이 땅은 면적이 2만894ha(208.94㎢), 여의도 면적(2.9㎢)의 약 70배 만한 크기로 1978년 8월 외무부가 매입했다. 당시 총 211만5,067달러(1ha당 미화 101달러)가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여의도 면적의 70배가 넘는 큰 땅을 구입해 놓고도 지난 27년간 이 땅에서는 벼 한 포기, 채소 한 단 자라지 않은 채 선인장과 야생의 터전이 돼 있었다. 이 땅은 왜 27년간 이 지경으로 방치됐을까?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후부터 민간 차원의 집단 농업이주가 증가했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농업이민은 대부분 실패했고, 불법 이민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자 정부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를 규제하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주도적으로 농업이민을 추진하기로 한다.
1975년 청와대 경제 제1실은 남미 농업이민 추진이 결정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78년 9월까지 다섯 차례 총 301일 동안 연인원 31명을 남미 지역에 파견했다. 현지 조사를 통해 농업이민 적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파라과이 등 6곳에 땅을 구입했다. 동시에 보건사회부와 상공부는 농업이민 지원자들을 모집했고, 이민자들은 전 재산을 투자금으로 예치해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정부 주도 이민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충분한 사전 정보가 없어 한국식 소농을 시도한 탓도 있지만, 정부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나섰다 낯선 땅에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갖가지 난관과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땅이 문제였다. 정부가 구입한 땅은 법적 하자가 있거나 농지로 쓸 수 없는 땅이 많았다. 땅 구입 과정에서부터 드러나 있던 하자에 눈을 감은 탓이었다. 정부 파견 조사단이나 현지 공관 관계자들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사하고, 심한 경우 땅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구입한 경우도 있었다.



수박 겉핥기식 조사로 쓸모없거나 쓸 수 없는 땅 구입
칠레 테노 농장(1980년 구입)의 경우는 보사부가 땅을 구입한 후에야 칠레 정부가 농업이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이없는 사례다. 농업이민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현지인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브라질 고야주에 위치한 십자성 새마을농장은 박정희 정권의 야심 찬 개발 프로젝트임에도 농장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법적 문제가 발생해 결국 브라질 정부에 기증해야 했다. 파라과이 산페드로 농장(1968년 구입)은 1977년까지 19가구 전원이 농장을 떠났다. 파라과이를 떠난 이민자들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재차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 실패 사례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랴흐타마우카 땅’이다(지금까지는 줄곧 농장으로 지칭돼 왔으나 현지 교민들의 요청으로 랴흐타마우카 땅 또는 야산으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측의 요청에 따라 랴흐타마우카 국유지로 지칭한다). 특히 이 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은퇴 후 가서 살겠다며 당시 주 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남철 대사를 특명대사로 임명할 정도로 애정을 쏟으며 지시해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동안 총 2,600만 달러를 투자해 300가구를 입주시킬 계획으로 구입한 이 땅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외무부가 농업진흥공사와 용역 계약을 체결해 영농시험을 실시한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30ha를 개간해 강낭콩·수수·면화 등을 재배해 봤으나 염분이 많고, 강우량이 부족한데다 기온이 지나치게 높아 작물의 결실 상태가 나빠 농사 부적격 결론이 내려진 것. 게다가 농장 개발비용으로 최대 2,870만 달러의 추가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외무부는 1979년 정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다시 한번 조사했다. 결과는 같았다. 영농에 부적합하고, 막대한 개발비가 드는데다 개발 후에도 이주자 입주 및 영농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농장 건설계획 추진은 무기한 보류됐다. 그러던 중 해외 이주 업무가 보사부로 변경되면서 농장 관리 업무 또한 외무부에서 보사부로 넘어갔다.
정부 차원의 개발이 수포로 돌아가자 1980년대에는 민간 업체와 대학·농업진흥공사 등에 무상 대여해 개발하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그러나 대부분 관심조차 갖지 않았으며 관심을 보인 경우도 과다하게 국고 지원을 요구하거나 계획에 현실성이 결여돼 있었다. 결국 1987년부터는 농장 처분에 필요한 사전 검토가 시작됐다. 그러던 중 1991년 한국국
제협력단(KOICA)이 설립돼 해외개발공사가 흡수되면서 다시 임대 개발을 시도했다. 역시 실패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주 아르헨티나 대사가 바뀔 때마다 현지 조사단이 파견되고, 농장 처분에 대해 논의했지만 항상 결론은 없었다. 총 8차례의 조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27년 동안 같은 땅을 놓고 매번 면피성 조사와 논의만 반복해 온 셈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광활한 남미에서 왜 하필 이런 땅을 구입하게 된 걸까? 구입 경위는 이렇다. 1975년 12월 말 김동희 당시 국립농업경제연구소장(한국농촌경제연구소의 전신) 등 7명의 조사단은 농업이민 가능성과 유리한 국가 선정을 목적으로 30일간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등에 파견돼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의 농업이민 대상국으로 아르헨티나가 선정됐다.
토지 브로커들의 사기극에 정부가 당했나
농수산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동희 소장은 또다시 10명의 조사팀을 이끌고 1976년 5월부터 장장 145일에 걸쳐 아르헨티나 내 이주정착 농장 적격지를 선정하기 위해 파견됐다. 조사팀은 다섯 곳의 후보지를 선정해 대통령에게 개발 방안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개발 방안 대신 채명신 당시 주 브라질 대사가 보고한 브라질의 십자성 새마을농장 계획이 채택되고 만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브라질 농장계획은 무산됐다. 이에 정부는 다시 아르헨티나 땅에 브라질 십자성 새마을농장 계획을 접목하기로 한다.
당시 청와대는 아르헨티나 내 적격지 물색을 위해 또다시 조사팀을 파견한다. 1977년 12월 말 당시 국립농업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김성호 박사가 이끄는 조사팀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 테네네 지구를 후보지로 결정한 후 청와대에 보고해 승인받는다.
그러나 이 지역이 제3자에게 매도됨에 따라 남철 당시 주 아르헨티나 대사는 미주 공관장회의에서 대체 토지로 순초 푸호와 로베르시 등 2개 후보지를 제시했고, 최종 합의 결과 1만1,500ha 의 순초 푸호가 선정됐다. 1978년 3월 이희일 당시 청와대 경제 제1수석비서관 등은 순초 푸호 농장에 대한 현지답사를 마친 후 170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는다.
의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4개월 후인 1978년 7월 김성호 박사를 중심으로 외무부·농림수산부·농업진흥공사가 참여한 정부 토지구입반은 현지에서 상부의 동의 없이 임의로 산초 푸호 농장이 아닌 지금의 랴흐타마우카 땅으로 변경 구입한다. 급하게 땅을 구입하느라 해외개발공사 아르헨티나 지사장이었던 이성근 씨의 개인 명의로 계약하고 10만 달러의 개인 돈으로 7월31일 가계약까지 맺는다. 이후 남철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노석찬 대사가 신임 공관장으로 파견돼 정식 계약을 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실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해 사후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했다.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 재가까지 받았던 순초 푸호 지역이 왜 갑자기 랴흐타마우카로 변경되었는가에 있다. 당시 땅 구입에 관여했던 인물들로는 남철 대사, 김성호 박사, 땅 계약자로 등기된 이성근 해개공 지사장, 남철 대사의 후임자인 노석찬 대사, 그리고 한국 정부에 땅을 소개한 현지 교민 사업가 이승일 씨가 등장한다.
땅을 가계약하고 정식 계약하는 와중에 대사가 바뀜으로써 땅을 조사한 것은 남 대사, 실제로 매매 계약을 한 것은 노 대사다. 교민들이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성근 지사장은 아쉽게도 2000년 암으로 사망했다.
이민 1세대로 40년 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이승일 씨는 유전과 광산 개발 등을 통해 현지에서 자리 잡은 사업가다. 땅 매매가 이루어진 1978년 당시 이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여행업을 하고 있었다.
교민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씨는 비자 발급 업무 등을 하면서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연결고리가 되는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고, 따라서 아르헨티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씨가 땅 구입에 참여하게 된 경위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가 가계약을 위해서는 이승일 씨를 내세우라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교민들은 주장한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만난 이씨는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남철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범농장용 땅을 구입해야 하니 알아봐 달라’고 해서 본국에서 파견된 김성호 박사와 함께 20여 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정한 땅이 랴흐타마우카”라면서 “김 박사와 남 대사에게 물어보면 잘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와 남 대사는 모두 “교민으로부터 소개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승일이라는 사람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ha당 20달러도 안 되는 땅 100달러에 사
산초 푸호에서 랴흐타마우카로 변경해 구입한 경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답변은 각각 달랐다. 이씨는 “산초 푸호 땅은 당시 토지대장이 없어서 랴흐타마우카로 급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땅에 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남 전 대사는 “구입과 관련해 관여한 바도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의 당시 주정부 관계자와 현지 부동산 소개업자, 교민 브로커 이씨 등이 벌인 ‘대정부 사기극’이라고 현지 교민들은 주장한다. 독일계 농장 주인이었던 패드로 에르마노스가 농사에 실패해 헐값에 처분하려고 내놓은 땅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중개인들에게 속아 쓸모없는 땅을 비싼 값에 샀다는 것이다.
수의사 출신으로 농업이민을 왔다 실패한 후 현재 부동산업을 하는 유상봉 씨는 “지금도 시세가 ha당 20~30달러밖에 안 하는 땅을 당시에 100달러에 샀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브로커들의 사기에 놀아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환율을 고려하면 페소로 샀어야 했는데 달러로 사서 손해 본 것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농업이민 1세대로 현재 호텔업을 하는 권혁태 사장도 “20~30달러라는 시가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얘기지, 사실상 시가가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차원의 수차례 조사에도, 랴흐타마우카 땅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한국 정부와 현지 대사관, 그리고 교민들은 농사는커녕 사람도 살기 힘든 불모지라고 주장하는 반면, 땅을 구입했던 당사자들은 좋은 땅인데 정치적 이유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승일 씨는 “랴흐타마우카는 태어날 때부터 사생아였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 표현까지 들먹이는 것일까? 이씨의 말을 들어보자.
“땅을 가계약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남철 씨에서 노석찬 씨로 바뀌었다. 청와대의 지시로 계약체결 때문에 휴가를 다 마치지 못하고 급하게 부임해야 했던 노 대사는 노기에 차 ‘이 땅 잘되나 보자. 당신이 뭔데 나를 오라가라 하느냐’면서 나와 그 땅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이씨의 주장대로라면 랴흐타마우카 땅은 대사관에 의해 고의로 방치됐고, 이후에 온 대사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농업적 가치가 있는 땅을 버려둔 것이 된다.
땅 구입 관계자들, “외무부가 좋은 땅 방치한 것”
은퇴 후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노 전 대사와는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씨는 “그 땅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1995년 한국 정부에 500만 달러를 투자해 목축지로 만들겠다는 5개년사업 계획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설명.
“그러나 외무부와 아르헨티나 대사관 측이 회의를 하더니 임대도, 매각도 못하겠다고 했다. 만일 내가 성공하면 역대 대사들이 다 다치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남미과 관계자는 “어떻게든 개발하는 것이 외교부로서도 짐을 더는 것인데 단지 거짓말의 일관성을 위해 개발을 막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땅 구입 후부터 남미의 농장들을 관리해 온 한국국제협력단(KOICA) 측은 “당시 이씨가 운영하는 ‘페트로 아메리카’라는 업체가 19년간 땅을 무상임대해 주고 농지 조성 및 축산 실시 비용, 인건비 등에 들어가는 300만 달러를 전액 정부가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해 불가 입장을 통보한 바 있다”며 이씨와는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최양부 주 아르헨티나 대사도 “이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무상임대해 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랴흐타마우카가 좋은 땅이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는다. 그는 “말의 사료로 쓰는 알팔파 재배나 소 키우는 데 제격”이라며 “소 키우는 데 적당한 땅에 곡류와 야채를 키우는 한국식 소농을 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된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당시 농업이민 형태가 기업형 대농이 아닌 곡류와 야채 재배 위주의 소농이었음에도 기업형 목축이 가능한 땅을 구입했다는 점은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 역시 땅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정부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사의 홍보담당자 헤르만 무니치는 “지금 당장 소를 넣고 키울 수도 있다”면서 “곳곳에 염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땅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남미식 목축은 “넓은 땅에 소를 풀어놓고 알아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땅 구입에 얽힌 당사자들은 농업이민 실패 이유를 땅의 부적격성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았다. 남철 전 대사는 “현장에도 직접 가봤는데 밀을 재배하기 좋은 땅이었다”면서 “경험이 없고, 아르헨티나를 통해 미국에 입국하려는 사람들만 선발해 보내 실패한 것”이라며 이민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성호 박사는 “1년을 오가며 조사하고 이희일 청와대 경제비서관도 직접 보고 구입한 땅”이라면서 “당시 박 대통령이 저격당하면서 농업이민이 흐지부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희일 전 경제비서관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 그 땅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 비서관은 그러나 “산초 푸호로 결정됐던 것이 아니라 농업전문가들이 더 싸고 넓은 땅이 있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그 땅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비서관 말대로라면 산초 푸호 땅에서 랴흐타마흐카 땅으로 변경 구입하는 과정에는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고, 정부 파견 조사단과 현지 교민에 의해 결정된 후 이들의 말만 믿고 사후 재가를 해 준 것이 된다.
수차례 조사 비용과 유지 비용으로 국고만 낭비
이들은 동시에 외무부에도 책임을 돌렸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외무부에서 타부처 관계자들이 파견돼 농업이민을 추진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전 비서관은 “그 땅이 나쁜 땅이라고 누가 그러더냐”면서 “외무부에서 관리 않하고 내팽개쳐 황무지가 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땅의 경제적 가치 여부를 떠나 이승일 씨의 말대로 외무부 측에서 고의로 방치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이민자들은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랴흐타마우카 국유지 인근인 투쿠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유홍준 씨는 “한마디로, 꿈 깨라”면서 “27년간 조사하고 또 조사했으면서 아직도 미련이 남았느냐”고 반문했다. 한 교민은 “토지 브로커와 현지 해외개발공사 직원의 말만 듣고 남 전 대사, 김 박사 등이 비행기로 한번 휙 둘러보고 구입했다”며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김인석 씨는 “비도 거의 오지 않고, 체감온도가 5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케브라초(반건조 지방 특유의 식물군)와 선인장뿐”이라면서 “먹을 풀과 물이 없는데 소가 어떻게 자라느냐”고 반문했다. 권혁태 씨는 제아무리 부지런한 독일인이 와도 척박하고 숨막히게 무더운 산티아고 땅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의 ‘산티아게(산티아고주 주민)의 오랜 농담’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던 외교부·KOICA, 그리고 현지 대사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농업경제 전문가이기도 한 최양부 아르헨티나 대사는 2003년 12월 다시 한번 조사팀을 꾸려 지난해 ‘랴흐타마우카 농장 활용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번에는 정치적 논란을 없애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농대의 축산·식물 전공 교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대학 임업·산림관리 전공 교수와 농장 개발 전문가 등 7명의 현지인과 공관 직원으로만 조사팀을 구성했다. 아르헨티나 국립 농축산기술연구원(INTA)의 기후 및 물 연구소의 자문도 구했다.
조사 결과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돼 대부분 진입조차 곤란했다. 우선 자연환경적 특성으로는 동계에는 일교차가 커 서리가 많으며, 하계는 온도가 45~50도까지 상승했다. 강우량은 연평균 500~600㎜ 내외로 부족한데다 하계(11월~3월)에 집중 강우하고 나머지 기간은 건기로 강우량이 170㎜ 정도여서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됐다. 게다가 “농장을 끼고 흐르는 살라도 강은 염기와 광물질이 함유돼 있고, 수원이 적어 관정 개발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알팔파를 재배하는 일부 농장 외에는 대부분 목재 생산에 의존하며 소와 염소 사육도 일부 보이지만 수익보다 생존 수단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사 참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물이 양적·질적으로 부족하고 반건조지역이므로 농작물 재배는 곤란하며 염분이 지면으로 올라와 농장 전체가 염분화될 우려가 있어 농업활동을 위한 벌목은 불가능하고, 삼림업과 목축업을 병행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목축업을 한다 해도 1.5ha당 1마리 정도를 사육할 수 있으며 번식우(생후 5~6개월까지 길러 다른 지역으로 보내 살찌우는 방식)만이 가능하다. 땅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발비용이 더 들어가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는 결론이다. 이 같은 땅을 수차례에 걸쳐 조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유지하기 위한 세금(연간 1만2,000달러)과 관리 비만 27년간 낭비해 온 셈이다.
그러나 랴흐타마우카 지역의 상황은 최근 들어 다소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본지 기자가 현지 르포를 갔을 때 마침 농림부·농촌진흥청·농업기반공사·한국농촌경제연구원으로 구성된 정부 농업조사단이 파견나와 있었다. 랴흐타마우카 땅의 조사를 담당했던 농업기반공사의 김동인 과장은 “예전에는 차가 진입할 도로조차 없을 정도로 사회간접자본이 전무했지만, 최근 폭 4m의 흙길이 30m로 확장됐고, 전신주가 세워져 일부에서는 전기도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중국이 아르헨티나 콩 수확량의 전량을 수입하면서 콩 재배가 늘어 목초지가 줄었고, 그렇다 보니 황무지로 여겨지던 북서부 지역을 개간해 알팔파 같은 목초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랴흐타마우카 인근에 생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땅의 지가가 대폭 상승하거나 개발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대사가 파견되고, 수차례의 조사를 했음에도 랴흐타마우카 땅이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돼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지 교민들은 이를 두고 “‘누가 역적이 되느냐’ 하는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랴흐타마우카 땅을 구입할 때 비해 턱없이 낮은 가격에 매각처분하거나 섣불리 막대한 비용이 드는 개발을 시도했다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역적’이 되는 위험 부담이 있어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누가 역적 되나’ 게임하는 땅
교민들에 따르면 1990년대 부임했던 한 대사가 땅의 매각처분을 본부에 건의한 적이 있는데, 외무부 장관이 “내가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내 재임 기간에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이 사례가 교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랴흐타마우카 땅은 ‘누가 역적이 되느냐’ 게임으로 불렸다. 지금도 현지 교민들 사이에서 이 땅은 ‘대사들에게는 골칫거리, 교민들에게는 웃음거리’로 통한다.
역적이 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고민은 이제 현 아르헨티나 공관장인 최양부 대사에게 주어졌다. 그는 “랴흐타마우카 땅이 경제성이 없다는 사실부터 빨리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경 취약 지구인 이 지역에 생태림을 조성해 ‘한국·아르헨티나 우호의 숲’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최 대사의 제안서가 길고 긴 ‘랴흐타마우카 농장 개발 추진 보고서’의 또 다른 한 문단으로 추가될지, 랴흐타마우카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될지는 최 대사와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머나먼 南美에 숨겨진 한국 땅 있다!
“27年 골칫거리, 아직 웃음거리”
혹 사고칠까 大使마다 쉬쉬…공짜 기증하기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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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계절도 한국과는 정반대인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서 북서쪽으로 98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에는 한국의 숨겨진 땅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정부 주도 농업이민을 위해 시범농장용으로 구입한 이 국유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70배. 구입비용은 211만 달러. 막대한 비용을 들여 머나먼 남미에 땅을 사놓고도 27년간 방치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7년간 벼 한 포기, 채소 한 단 키워보지 못한 황무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여서 길도 사라지고 없다. 누구의 것이기에 사유권을 표시하는 철조망조차 없이 버려져 있는 것일까?
그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1978년 정부의 남미 농업이민자 모집 공고를 보고 머나먼 땅 아르헨티나까지 떠나온 김인석 씨. 그의 가슴속에는 오랜 세월 굳어져 온 응어리가 있다.
“내 땅을 갖고 내 땅에서 수확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었던 김씨에게 남미 농업이민은 새로운 희망이었고, 농업이민의 실패는 평생의 한이 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이민을 보낸 한국 정부에도, 이민자들이 말이 안 통하고 현지 사정에 어둡다는 점을 악용한 교민 브로커들에게도, 서로 돕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된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침묵했다.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김인석 씨는 현재 중앙교회 노인대학이 소유한 라 플라타 지역에서 소일거리로 야채농장을 경영하며 노인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김씨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5월28일 농업이민으로 아르헨티나에 와서 실패한 후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민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다.
랴흐타마우카 땅 전경.사막화 현상으로 선인장,가시덤불이 무성하다. |
농업고와 농대를 나온 후 대구 지역에서 화학과 교사생활을 하던 김씨는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한국에서 농사의 꿈을 펼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미의 광활한 땅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1978년 보건사회부(신현확 장관)의 모집 공고에 따라 다른 17가구의 이민자들과 함께 2만 달러의 투자금을 내고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의 이스크자쿠 농장에 도착한 김씨.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옥한 농토 대신 기온이 한낮에는 40~50도씩 올라가고, 강수량이 170㎜에 불과한 메마른 사막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가운데에서도 밤낮을 일해 6개월 만에 콩을 재배하는 데는 성공했다. ha당 1.6~1.7t의 콩을 수확한 것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 입장에서는 고무적인 일로, 당시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막에서 콩농사를 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평작도 안 되는 수확량을 거두기 위해 밤낮을 무더위와 싸워가며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콩 재배 성공 사례는 청와대에까지 보고돼 대통령 특별하사금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는 17가구의 농업이주민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도시로 나와 봉제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크자쿠 농장이 성공 사례로 한국 정부에 잘못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은 이스크자쿠 인근에 대규모의 땅을 구입해 한국인 집단농장과 코리아타운을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랴흐타마우카(llajta-mauca) 땅이다. 300가구의 농업이민자 입주를 목표로 시범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구입한 2만ha의 이 땅. 하지만 결국 단 한 가구의 이민도 받지 못한 채 27년 동안 ‘숨겨진 한국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쪽으로 986km 떨어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에 위치한 이 땅은 면적이 2만894ha(208.94㎢), 여의도 면적(2.9㎢)의 약 70배 만한 크기로 1978년 8월 외무부가 매입했다. 당시 총 211만5,067달러(1ha당 미화 101달러)가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여의도 면적의 70배가 넘는 큰 땅을 구입해 놓고도 지난 27년간 이 땅에서는 벼 한 포기, 채소 한 단 자라지 않은 채 선인장과 야생의 터전이 돼 있었다. 이 땅은 왜 27년간 이 지경으로 방치됐을까?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후부터 민간 차원의 집단 농업이주가 증가했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농업이민은 대부분 실패했고, 불법 이민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자 정부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를 규제하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주도적으로 농업이민을 추진하기로 한다.
1975년 청와대 경제 제1실은 남미 농업이민 추진이 결정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78년 9월까지 다섯 차례 총 301일 동안 연인원 31명을 남미 지역에 파견했다. 현지 조사를 통해 농업이민 적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파라과이 등 6곳에 땅을 구입했다. 동시에 보건사회부와 상공부는 농업이민 지원자들을 모집했고, 이민자들은 전 재산을 투자금으로 예치해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정부 주도 이민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충분한 사전 정보가 없어 한국식 소농을 시도한 탓도 있지만, 정부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나섰다 낯선 땅에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갖가지 난관과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땅이 문제였다. 정부가 구입한 땅은 법적 하자가 있거나 농지로 쓸 수 없는 땅이 많았다. 땅 구입 과정에서부터 드러나 있던 하자에 눈을 감은 탓이었다. 정부 파견 조사단이나 현지 공관 관계자들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사하고, 심한 경우 땅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구입한 경우도 있었다.
수박 겉핥기식 조사로 쓸모없거나 쓸 수 없는 땅 구입
칠레 테노 농장(1980년 구입)의 경우는 보사부가 땅을 구입한 후에야 칠레 정부가 농업이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이없는 사례다. 농업이민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현지인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브라질 고야주에 위치한 십자성 새마을농장은 박정희 정권의 야심 찬 개발 프로젝트임에도 농장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법적 문제가 발생해 결국 브라질 정부에 기증해야 했다. 파라과이 산페드로 농장(1968년 구입)은 1977년까지 19가구 전원이 농장을 떠났다. 파라과이를 떠난 이민자들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재차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 실패 사례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랴흐타마우카 땅’이다(지금까지는 줄곧 농장으로 지칭돼 왔으나 현지 교민들의 요청으로 랴흐타마우카 땅 또는 야산으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측의 요청에 따라 랴흐타마우카 국유지로 지칭한다). 특히 이 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은퇴 후 가서 살겠다며 당시 주 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남철 대사를 특명대사로 임명할 정도로 애정을 쏟으며 지시해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동안 총 2,600만 달러를 투자해 300가구를 입주시킬 계획으로 구입한 이 땅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외무부가 농업진흥공사와 용역 계약을 체결해 영농시험을 실시한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30ha를 개간해 강낭콩·수수·면화 등을 재배해 봤으나 염분이 많고, 강우량이 부족한데다 기온이 지나치게 높아 작물의 결실 상태가 나빠 농사 부적격 결론이 내려진 것. 게다가 농장 개발비용으로 최대 2,870만 달러의 추가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외무부는 1979년 정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다시 한번 조사했다. 결과는 같았다. 영농에 부적합하고, 막대한 개발비가 드는데다 개발 후에도 이주자 입주 및 영농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농장 건설계획 추진은 무기한 보류됐다. 그러던 중 해외 이주 업무가 보사부로 변경되면서 농장 관리 업무 또한 외무부에서 보사부로 넘어갔다.
정부 차원의 개발이 수포로 돌아가자 1980년대에는 민간 업체와 대학·농업진흥공사 등에 무상 대여해 개발하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그러나 대부분 관심조차 갖지 않았으며 관심을 보인 경우도 과다하게 국고 지원을 요구하거나 계획에 현실성이 결여돼 있었다. 결국 1987년부터는 농장 처분에 필요한 사전 검토가 시작됐다. 그러던 중 1991년 한국국
제협력단(KOICA)이 설립돼 해외개발공사가 흡수되면서 다시 임대 개발을 시도했다. 역시 실패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주 아르헨티나 대사가 바뀔 때마다 현지 조사단이 파견되고, 농장 처분에 대해 논의했지만 항상 결론은 없었다. 총 8차례의 조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27년 동안 같은 땅을 놓고 매번 면피성 조사와 논의만 반복해 온 셈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광활한 남미에서 왜 하필 이런 땅을 구입하게 된 걸까? 구입 경위는 이렇다. 1975년 12월 말 김동희 당시 국립농업경제연구소장(한국농촌경제연구소의 전신) 등 7명의 조사단은 농업이민 가능성과 유리한 국가 선정을 목적으로 30일간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등에 파견돼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의 농업이민 대상국으로 아르헨티나가 선정됐다.
랴흐타마우카 인근 최근 개발중인 농장. 알팔파 재배지로 조성돼 있다. |
농수산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동희 소장은 또다시 10명의 조사팀을 이끌고 1976년 5월부터 장장 145일에 걸쳐 아르헨티나 내 이주정착 농장 적격지를 선정하기 위해 파견됐다. 조사팀은 다섯 곳의 후보지를 선정해 대통령에게 개발 방안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개발 방안 대신 채명신 당시 주 브라질 대사가 보고한 브라질의 십자성 새마을농장 계획이 채택되고 만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브라질 농장계획은 무산됐다. 이에 정부는 다시 아르헨티나 땅에 브라질 십자성 새마을농장 계획을 접목하기로 한다.
당시 청와대는 아르헨티나 내 적격지 물색을 위해 또다시 조사팀을 파견한다. 1977년 12월 말 당시 국립농업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김성호 박사가 이끄는 조사팀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 테네네 지구를 후보지로 결정한 후 청와대에 보고해 승인받는다.
그러나 이 지역이 제3자에게 매도됨에 따라 남철 당시 주 아르헨티나 대사는 미주 공관장회의에서 대체 토지로 순초 푸호와 로베르시 등 2개 후보지를 제시했고, 최종 합의 결과 1만1,500ha 의 순초 푸호가 선정됐다. 1978년 3월 이희일 당시 청와대 경제 제1수석비서관 등은 순초 푸호 농장에 대한 현지답사를 마친 후 170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는다.
의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4개월 후인 1978년 7월 김성호 박사를 중심으로 외무부·농림수산부·농업진흥공사가 참여한 정부 토지구입반은 현지에서 상부의 동의 없이 임의로 산초 푸호 농장이 아닌 지금의 랴흐타마우카 땅으로 변경 구입한다. 급하게 땅을 구입하느라 해외개발공사 아르헨티나 지사장이었던 이성근 씨의 개인 명의로 계약하고 10만 달러의 개인 돈으로 7월31일 가계약까지 맺는다. 이후 남철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노석찬 대사가 신임 공관장으로 파견돼 정식 계약을 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실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해 사후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했다.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 재가까지 받았던 순초 푸호 지역이 왜 갑자기 랴흐타마우카로 변경되었는가에 있다. 당시 땅 구입에 관여했던 인물들로는 남철 대사, 김성호 박사, 땅 계약자로 등기된 이성근 해개공 지사장, 남철 대사의 후임자인 노석찬 대사, 그리고 한국 정부에 땅을 소개한 현지 교민 사업가 이승일 씨가 등장한다.
땅을 가계약하고 정식 계약하는 와중에 대사가 바뀜으로써 땅을 조사한 것은 남 대사, 실제로 매매 계약을 한 것은 노 대사다. 교민들이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성근 지사장은 아쉽게도 2000년 암으로 사망했다.
이민 1세대로 40년 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이승일 씨는 유전과 광산 개발 등을 통해 현지에서 자리 잡은 사업가다. 땅 매매가 이루어진 1978년 당시 이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여행업을 하고 있었다.
교민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씨는 비자 발급 업무 등을 하면서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연결고리가 되는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고, 따라서 아르헨티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씨가 땅 구입에 참여하게 된 경위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가 가계약을 위해서는 이승일 씨를 내세우라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교민들은 주장한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만난 이씨는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남철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범농장용 땅을 구입해야 하니 알아봐 달라’고 해서 본국에서 파견된 김성호 박사와 함께 20여 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정한 땅이 랴흐타마우카”라면서 “김 박사와 남 대사에게 물어보면 잘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와 남 대사는 모두 “교민으로부터 소개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승일이라는 사람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산초 푸호에서 랴흐타마우카로 변경해 구입한 경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답변은 각각 달랐다. 이씨는 “산초 푸호 땅은 당시 토지대장이 없어서 랴흐타마우카로 급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땅에 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남 전 대사는 “구입과 관련해 관여한 바도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의 당시 주정부 관계자와 현지 부동산 소개업자, 교민 브로커 이씨 등이 벌인 ‘대정부 사기극’이라고 현지 교민들은 주장한다. 독일계 농장 주인이었던 패드로 에르마노스가 농사에 실패해 헐값에 처분하려고 내놓은 땅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중개인들에게 속아 쓸모없는 땅을 비싼 값에 샀다는 것이다.
수의사 출신으로 농업이민을 왔다 실패한 후 현재 부동산업을 하는 유상봉 씨는 “지금도 시세가 ha당 20~30달러밖에 안 하는 땅을 당시에 100달러에 샀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브로커들의 사기에 놀아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환율을 고려하면 페소로 샀어야 했는데 달러로 사서 손해 본 것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농업이민 1세대로 현재 호텔업을 하는 권혁태 사장도 “20~30달러라는 시가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얘기지, 사실상 시가가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차원의 수차례 조사에도, 랴흐타마우카 땅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한국 정부와 현지 대사관, 그리고 교민들은 농사는커녕 사람도 살기 힘든 불모지라고 주장하는 반면, 땅을 구입했던 당사자들은 좋은 땅인데 정치적 이유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승일 씨는 “랴흐타마우카는 태어날 때부터 사생아였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 표현까지 들먹이는 것일까? 이씨의 말을 들어보자.
“땅을 가계약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남철 씨에서 노석찬 씨로 바뀌었다. 청와대의 지시로 계약체결 때문에 휴가를 다 마치지 못하고 급하게 부임해야 했던 노 대사는 노기에 차 ‘이 땅 잘되나 보자. 당신이 뭔데 나를 오라가라 하느냐’면서 나와 그 땅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이씨의 주장대로라면 랴흐타마우카 땅은 대사관에 의해 고의로 방치됐고, 이후에 온 대사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농업적 가치가 있는 땅을 버려둔 것이 된다.
땅 구입 관계자들, “외무부가 좋은 땅 방치한 것”
은퇴 후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노 전 대사와는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씨는 “그 땅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1995년 한국 정부에 500만 달러를 투자해 목축지로 만들겠다는 5개년사업 계획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설명.
“그러나 외무부와 아르헨티나 대사관 측이 회의를 하더니 임대도, 매각도 못하겠다고 했다. 만일 내가 성공하면 역대 대사들이 다 다치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남미과 관계자는 “어떻게든 개발하는 것이 외교부로서도 짐을 더는 것인데 단지 거짓말의 일관성을 위해 개발을 막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땅 구입 후부터 남미의 농장들을 관리해 온 한국국제협력단(KOICA) 측은 “당시 이씨가 운영하는 ‘페트로 아메리카’라는 업체가 19년간 땅을 무상임대해 주고 농지 조성 및 축산 실시 비용, 인건비 등에 들어가는 300만 달러를 전액 정부가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해 불가 입장을 통보한 바 있다”며 이씨와는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최양부 주 아르헨티나 대사도 “이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무상임대해 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랴흐타마우카가 좋은 땅이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는다. 그는 “말의 사료로 쓰는 알팔파 재배나 소 키우는 데 제격”이라며 “소 키우는 데 적당한 땅에 곡류와 야채를 키우는 한국식 소농을 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된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당시 농업이민 형태가 기업형 대농이 아닌 곡류와 야채 재배 위주의 소농이었음에도 기업형 목축이 가능한 땅을 구입했다는 점은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정부 역시 땅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정부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사의 홍보담당자 헤르만 무니치는 “지금 당장 소를 넣고 키울 수도 있다”면서 “곳곳에 염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땅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남미식 목축은 “넓은 땅에 소를 풀어놓고 알아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땅 구입에 얽힌 당사자들은 농업이민 실패 이유를 땅의 부적격성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았다. 남철 전 대사는 “현장에도 직접 가봤는데 밀을 재배하기 좋은 땅이었다”면서 “경험이 없고, 아르헨티나를 통해 미국에 입국하려는 사람들만 선발해 보내 실패한 것”이라며 이민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성호 박사는 “1년을 오가며 조사하고 이희일 청와대 경제비서관도 직접 보고 구입한 땅”이라면서 “당시 박 대통령이 저격당하면서 농업이민이 흐지부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희일 전 경제비서관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 그 땅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 비서관은 그러나 “산초 푸호로 결정됐던 것이 아니라 농업전문가들이 더 싸고 넓은 땅이 있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그 땅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비서관 말대로라면 산초 푸호 땅에서 랴흐타마흐카 땅으로 변경 구입하는 과정에는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고, 정부 파견 조사단과 현지 교민에 의해 결정된 후 이들의 말만 믿고 사후 재가를 해 준 것이 된다.
수차례 조사 비용과 유지 비용으로 국고만 낭비
이들은 동시에 외무부에도 책임을 돌렸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외무부에서 타부처 관계자들이 파견돼 농업이민을 추진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전 비서관은 “그 땅이 나쁜 땅이라고 누가 그러더냐”면서 “외무부에서 관리 않하고 내팽개쳐 황무지가 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땅의 경제적 가치 여부를 떠나 이승일 씨의 말대로 외무부 측에서 고의로 방치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이민자들은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랴흐타마우카 국유지 인근인 투쿠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유홍준 씨는 “한마디로, 꿈 깨라”면서 “27년간 조사하고 또 조사했으면서 아직도 미련이 남았느냐”고 반문했다. 한 교민은 “토지 브로커와 현지 해외개발공사 직원의 말만 듣고 남 전 대사, 김 박사 등이 비행기로 한번 휙 둘러보고 구입했다”며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김인석 씨는 “비도 거의 오지 않고, 체감온도가 5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케브라초(반건조 지방 특유의 식물군)와 선인장뿐”이라면서 “먹을 풀과 물이 없는데 소가 어떻게 자라느냐”고 반문했다. 권혁태 씨는 제아무리 부지런한 독일인이 와도 척박하고 숨막히게 무더운 산티아고 땅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의 ‘산티아게(산티아고주 주민)의 오랜 농담’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던 외교부·KOICA, 그리고 현지 대사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농업경제 전문가이기도 한 최양부 아르헨티나 대사는 2003년 12월 다시 한번 조사팀을 꾸려 지난해 ‘랴흐타마우카 농장 활용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번에는 정치적 논란을 없애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농대의 축산·식물 전공 교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대학 임업·산림관리 전공 교수와 농장 개발 전문가 등 7명의 현지인과 공관 직원으로만 조사팀을 구성했다. 아르헨티나 국립 농축산기술연구원(INTA)의 기후 및 물 연구소의 자문도 구했다.
조사 결과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돼 대부분 진입조차 곤란했다. 우선 자연환경적 특성으로는 동계에는 일교차가 커 서리가 많으며, 하계는 온도가 45~50도까지 상승했다. 강우량은 연평균 500~600㎜ 내외로 부족한데다 하계(11월~3월)에 집중 강우하고 나머지 기간은 건기로 강우량이 170㎜ 정도여서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됐다. 게다가 “농장을 끼고 흐르는 살라도 강은 염기와 광물질이 함유돼 있고, 수원이 적어 관정 개발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알팔파를 재배하는 일부 농장 외에는 대부분 목재 생산에 의존하며 소와 염소 사육도 일부 보이지만 수익보다 생존 수단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사 참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물이 양적·질적으로 부족하고 반건조지역이므로 농작물 재배는 곤란하며 염분이 지면으로 올라와 농장 전체가 염분화될 우려가 있어 농업활동을 위한 벌목은 불가능하고, 삼림업과 목축업을 병행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목축업을 한다 해도 1.5ha당 1마리 정도를 사육할 수 있으며 번식우(생후 5~6개월까지 길러 다른 지역으로 보내 살찌우는 방식)만이 가능하다. 땅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발비용이 더 들어가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는 결론이다. 이 같은 땅을 수차례에 걸쳐 조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유지하기 위한 세금(연간 1만2,000달러)과 관리 비만 27년간 낭비해 온 셈이다.
그러나 랴흐타마우카 지역의 상황은 최근 들어 다소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본지 기자가 현지 르포를 갔을 때 마침 농림부·농촌진흥청·농업기반공사·한국농촌경제연구원으로 구성된 정부 농업조사단이 파견나와 있었다. 랴흐타마우카 땅의 조사를 담당했던 농업기반공사의 김동인 과장은 “예전에는 차가 진입할 도로조차 없을 정도로 사회간접자본이 전무했지만, 최근 폭 4m의 흙길이 30m로 확장됐고, 전신주가 세워져 일부에서는 전기도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중국이 아르헨티나 콩 수확량의 전량을 수입하면서 콩 재배가 늘어 목초지가 줄었고, 그렇다 보니 황무지로 여겨지던 북서부 지역을 개간해 알팔파 같은 목초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랴흐타마우카 인근에 생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땅의 지가가 대폭 상승하거나 개발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대사가 파견되고, 수차례의 조사를 했음에도 랴흐타마우카 땅이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돼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지 교민들은 이를 두고 “‘누가 역적이 되느냐’ 하는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랴흐타마우카 땅을 구입할 때 비해 턱없이 낮은 가격에 매각처분하거나 섣불리 막대한 비용이 드는 개발을 시도했다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역적’이 되는 위험 부담이 있어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누가 역적 되나’ 게임하는 땅
교민들에 따르면 1990년대 부임했던 한 대사가 땅의 매각처분을 본부에 건의한 적이 있는데, 외무부 장관이 “내가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내 재임 기간에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이 사례가 교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랴흐타마우카 땅은 ‘누가 역적이 되느냐’ 게임으로 불렸다. 지금도 현지 교민들 사이에서 이 땅은 ‘대사들에게는 골칫거리, 교민들에게는 웃음거리’로 통한다.
역적이 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고민은 이제 현 아르헨티나 공관장인 최양부 대사에게 주어졌다. 그는 “랴흐타마우카 땅이 경제성이 없다는 사실부터 빨리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경 취약 지구인 이 지역에 생태림을 조성해 ‘한국·아르헨티나 우호의 숲’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최 대사의 제안서가 길고 긴 ‘랴흐타마우카 농장 개발 추진 보고서’의 또 다른 한 문단으로 추가될지, 랴흐타마우카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될지는 최 대사와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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